솔직히 말하면 프라그마타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2020년에 처음 공개되고 나서 무려 6년을 기다렸으니까. 그 사이에 출시일이 몇 번이나 미뤄졌는지 모른다. 개발 지옥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막상 4월 17일 출시되자마자 바로 구매해서 이틀 동안 거의 붙어 살다시피 했는데,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한마디로 정리하면"캡콤이 또 해냈다"는 느낌이었다.
첫인상: 달 위의 연구소가 이렇게 예쁠 일인가
게임을 시작하면 주인공 휴 윌리엄스가 달의 연구 시설에 도착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델파이 코퍼레이션이라는 기업이 운영하는 이 시설에서는 루나필라멘트라는 광물을 채굴해서 3D 프린터로 건물이든 무기든 뭐든 순식간에 찍어내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설정부터 SF 감성이 제대로인데, 여기에 RE 엔진의 그래픽이 더해지니까 달 기지의 차갑고 깨끗한 금속 패널 하나하나가 진짜 실사 같다.
PC 기준으로 패스 트레이싱을 켜면 반사광이 물리적으로 정확하게 표현되는데, 특히 달 기지처럼 반사율이 높은 환경에서 그 위력이 장난이 아니다. 캡콤이 엔비디아랑 18개월 동안 같이 작업했다는 게 체감이 될 정도. 물론 RTX 40시리즈 이상에서만 제대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뉴욕 시가지를 재현한 바이옴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진심으로 멈춰서 한참 둘러봤다. 달 표면 위에 인류 문명의 복제품이 펼쳐져 있다는 설정 자체가 기묘한데, 그걸 시각적으로 구현한 퀄리티가 압도적이다.
핵심 메카닉: 해킹+슈팅 동시 조작의 쾌감
프라그마타의 가장 큰 특징은 해킹과 슈팅을 동시에 수행하는 전투 시스템이다. 주인공 휴가 총을 쏘는 건 여느 3인칭 슈터와 비슷한데, 문제는 지구에서 가져온 무기로는 달 기지 로봇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안드로이드 소녀 다이아나가 등장한다.
적을 조준하면 화면 오른쪽에 해킹 그리드가 뜨는데, 컨트롤러 페이스 버튼이나 마우스로 이 그리드를 탐색해서 녹색 노드까지 경로를 만들면 해킹이 완료된다. 파란색 노드를 지나가면 데미지가 증폭되고, 노란색 노드는 혼란이나 다중 해킹 같은 특수 효과를 부여한다. 빨간색 노드를 밟으면 실패해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해킹 노드 간단 정리
노드 색상
효과
녹색
해킹 완료 지점 (최종 목표)
파란색
경유 시 데미지 증폭
노란색
특수 효과 (혼란, 다중 해킹, 회복 등)
회색
경로 차단
빨간색
접촉 시 해킹 실패
이게 실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게 핵심이다. 해킹 그리드에 집중하는 사이에도 로봇들은 계속 공격해오니까, 회피 동작을 섞어가면서 동시에 퍼즐을 풀어야 한다. 처음에는 머리가 좀 복잡한데,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진짜 중독이 시작된다. 마지막 순간에 닷지로 빠지면서 해킹을 완료하고 샷건으로 약점을 때리면 슬로모션이 터지는데, 그 쾌감이 어마어마하다.
한 손으로 드럼 치고 다른 손으로 피아노 치는 느낌이라고 하면 좀 과장일까. 근데 그 멀티태스킹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의 쾌감은 최근 몇 년간 플레이한 슈터 중 최고 수준이었다.
다이아나와 휴: 이 조합이 게임을 살린다
휴는 솔직히 전형적인 주인공이다. 얼굴도 잘 안 보이고, 대사도 "이게 뭐야?"나 "좋았어!" 수준으로 단순하다. 근데 신기한 게, 그 단순함이 오히려 다이아나와의 관계를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다. 다이아나는 안드로이드지만 생일이나 석양 같은 인간적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휴가 그런 것들을 하나씩 알려주는 구도가 묘하게 감정선을 건드린다.
게임플레이적으로도 다이아나가 없는 구간이 잠깐 나오는데, 그 순간 해킹 시스템이 빠지면서 전투가 확 밋밋해진다. 이게 의도된 연출이라는 걸 알면서도 "빨리 다이아나 돌아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두 캐릭터의 유대감을 게임 메카닉 자체에 녹여낸 건 정말 잘한 선택이다.
쉘터라고 불리는 거점에서는 다이아나에게 REM 칩을 선물해서 지구본이나 미끄럼틀 같은 놀이 세트를 만들어줄 수 있는데, 순수하게 꾸미기 요소일 뿐인데도 다이아나가 이걸로 놀면서 신나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뿌듯해진다.
보스전은 진짜 대단하다
일반 전투도 훌륭하지만, 보스전에서 프라그마타의 전투 시스템이 빛을 발한다. 각 보스마다 새로운 전술 옵션과 패턴을 제시하는데, 단순히 체력이 많은 적을 오래 때리는 식이 아니라 아레나 구조와 보스 디자인 자체가 전투 방식을 바꿔놓는다. 중반부에 나오는 거대한 전갈 로봇 보스는 개인적으로 올해 플레이한 보스전 중 톱3에 들어갈 만큼 인상적이었다.
캡콤이 일본 SF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거대 로봇 카이주 보스전을 넣은 것도 센스가 좋다. 스케일이 확 커지면서 긴장감이 몇 배로 뛴다.
아쉬운 점도 솔직하게
완벽한 게임은 아니다. 스토리가 AI의 위험성이나 가상 경험에 대해 뭔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려는 듯한 뉘앙스가 초반에 보이는데, 결국 깊이 있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휴와 다이아나의 부녀 관계 역시 감동적이긴 하지만 좀 직설적으로 밀어붙이는 면이 있어서 "알겠어, 감동적이라는 거지?"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달 기지 환경도 초반 몇 시간이 지나면 시각적으로 다소 단조로워지는 건 사실이다. 물론 뉴욕 시가지나 홀로그래픽 해변 같은 인공 환경이 등장하면서 분위기 전환이 되긴 하지만, 기지 내부만 돌아다니는 구간에서는 살짝 지루함이 느껴질 수 있다.
기본 슈팅 자체도 약간 뻣뻣한 편이다. 해킹이 없으면 총기 피드백만으로는 좀 부족하다는 느낌인데, 다행히 해킹이 빠지는 구간이 길지 않아서 치명적인 단점까지는 아니다.
볼륨과 리플레이: 12~15시간의 밀도
첫 회차 클리어까지 대략 12~15시간 정도 걸린다. 요즘 오픈월드 60시간짜리 게임에 익숙한 사람한테는 짧게 느껴질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게 딱 맞다고 본다. 쓸데없는 부풀리기 없이 전투와 스토리가 빈틈없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클리어 후에는 뉴게임 플러스가 열리고, 전투 중심의 포스트게임 모드와 다양한 훈련 시뮬레이션도 있다. 레이저를 피하는 시뮬레이션은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인데, 예상외로 중독성이 있어서 한참 붙잡고 있었다.
라이브 서비스도 없고, 쓸데없는 유행 따라하기도 없다. 그냥 단단한 싱글플레이어 액션 게임. 이런 게임이 2026년에 AAA급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반갑다.
총평: Xbox 360 시대의 감성을 2026년 기술로
여러 리뷰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다. "Xbox 360 시대 게임의 감성"이라는 거다. 리니어한 구성, 적당한 플레이타임, 독특한 메카닉 하나로 끝까지 밀고 가는 구조. 매스 이펙트나 바이오닉 코만도 같은 게임들이 떠오르는 그 시절 느낌. 그런데 그걸 2026년 최신 기술로 감싸놓으니까, 향수와 신선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스팀에서 압도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고, 오픈크리틱 87점, 메타크리틱 85점으로 올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AAA 타이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캡콤이 레지던트 이블 레퀴엠에 이어 2026년 두 번째 대작을 연달아 성공시킨 셈이다.
해킹과 슈팅의 조합이라는 낯선 시스템이 과연 먹힐까 걱정했던 사람들에게, 프라그마타는 확실한 답을 내놓았다. 익숙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경험. 캡콤의 저력이 다시 한번 증명된 작품이다. 만약 최근에 단단한 싱글플레이어 액션이 그리웠다면, 이 게임은 반드시 플레이해야 한다.